여자배구의 현재와 미래, 김연경&이재영 | 2015/08/17
# ‘대세 언니’가 어려운 국대 막내
“고등학교 때부터 숙소 라커 문 안쪽에 포스트잇으로 ‘제2의 김연경이 되자’라고 써놨었어요. 그만큼 연경 언니는 제 우상과 같은 분이에요. 그런 분과 함께 대표팀에서 뛰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2014-15시즌 V리그 신인왕에 올랐던 이재영(19·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김연경을 이을 ‘슈퍼 루키’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팀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신인왕 수상이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나름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이재영은 27경기에 출전, 경기당 평균 13.85득점(총 374득점, 전체 12위), 공격성공률 40.84%(전체 5위), 수비 5.92%(전체 3위)를 기록했다). 지난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에 발탁되긴 했지만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어 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올시즌 대표팀에서 김연경과 함께 대각을 이루는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신나게 ‘소원 풀이’ 중이다.
이재영은 지난 5월 중국 텐진에서 열렸던 2015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이미 김연경과 호흡을 맞춰본 바 있다. 당시 매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터라 오는 22일 일본에서 열리는 여자배구 월드컵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이정철 대표팀 감독은 김연경에게 집중될 상대팀의 공략에 이재영 등의 젊은 선수들이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 들어왔었어요. 태국에서 열렸던 아시아선수권대회였는데, 거기서 연경 언니를 처음 본 거예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언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언니처럼 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감히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더라고요. 이후 언니가 장난을 쳐도 그걸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언니가 옆에만 있으면 한 마디도 못했던 것 같아요.”
지난 5월 중국 텐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팀 선수들의 치킨 회식 자리가 열렸다. 이재영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김연경의 아우라에 눌려 1시간 30분 동안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고 치킨만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연경 언니가 어렵고 무서운 건 사실이에요. 제가 연경 언니를 너무 어려워하는 건가요?”
2015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은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0-3(21-25 21-25 21-25)으로 아쉽게 패했지만 지난 2001년 이후 14년 만에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연경 언니의 승부욕이 남달랐어요. 저도 못지않게 (승부욕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언니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고요. 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요. 전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고 실수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큰 편이에요. 반면에 언니는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거침이 없더라고요. 어떤 볼이 넘어와도 자신감이 넘쳐요. 눈빛에서 상대를 압도해버리죠.”
이재영은 미디어에서 자신을 가리켜 ‘제2의 김연경’으로 부르는데 대해 부담이 크다고 말한다.
“그 타이틀을 달기엔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저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박정아, 이소영 언니도 있는데, 그런 얘길 들으면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이재영은 배구 선수로 성장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넌 키가 작아서 안돼’라는 내용이었단다.
“어렸을 때부터 키와 관련된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성장했어요. 그러다보니 키가 작아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 대표팀에서 보내는 생활이 중요해요. 동기부여는 물론 배움과 경험면에서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179cm의 신장인 이재영은 키가 4,5cm만 더 컸으면 하는 게 희망사항이다.
이재영은 세계 강팀들이 출전하는 월드컵 대회에 대해 부담보다는 자신감을 한껏 드러냈다.
“이번 월드컵 대회는 특별해요. 연경 언니보다 잘할 수 없겠지만, 언니가 짊어진 몫을 조금은 나눠가질 수 있는 후배가 되고 싶고, 그래서 언니한테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여자배구 랭킹 1위인 미국이랑 첫 게임부터 맞붙는데 긴장을 덜고 재미있게 즐기고 싶습니다.”
# 김연경이 꼽는‘제2의 김연경’은?
김연경은 ‘제2의 김연경’으로 꼽히는 이재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재영이는 신장이 크지 않은 대신 뛰어난 점프력과 파워가 있어 공격수로선 흠잡을 데가 없다”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대신 단점을 꼽는다면 리시브예요. 수비에선 굴곡 없이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쳐야 하는데 그게 아직은 부족해 보여요. 그래도 재영이를 대표팀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프로 입단 후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지난 아시아선수권대회 때 보니까 이전과 또 다른 모습이더라고요. 대표팀 경기를 치를수록 저 혼자 힘으론 힘들거든요. 재영이처럼 감각이 뛰어난 후배들이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저도 많이 돕고 싶어요.”
김연경은 이재영이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얘기에 “절요? 왜요? 제가 재영이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도 대표팀에서 막내였을 때는 선배들이 어렵고 무서웠어요. 언니들은 제게 장난을 치는 건데, 전 그게 장난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아마 재영이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2의 김연경’을 꼽아 달라고요? 흠…, 포지션은 다르지만 현재 대표팀에선 (김)희진이의 성장 속도가 눈에 띄거든요. 소속팀에서 우승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대표팀 소집이 있을 때마다 체력, 실력, 멘탈, 모든 부분들이 ‘업그레이드’ 돼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제 뒤를 이을 해외 진출 2호 선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요.”
김연경은 터키리그 페네르바체에서 4년을 뛰며 이룰 건 다 이뤘다. 2011-2012 시즌 페네르바체의 유럽배구연맹(CEV)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동시에 MVP를 수상했고, 2013-2014 시즌에는 CEV컵 대회 우승과 MVP를, 그리고 2014-2015 시즌에는 4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김연경으로선 터키에서 처음 맛본 리그 우승이었다. 올 시즌 눈부신 활약을 펼친 김연경은 리그 3관왕(최우수선수상·스파이커상·득점상)에 오르기도 했다. 터키리그를 ‘올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9월 시즌에 들어가면 김연경은 페네르바체와 계약된 마지막 시즌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페네르바체에선 계속 함께 가주길 바라지만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하겠다는 입장이에요. 지금의 팀은 제 위주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어요. 모든 걸 저한테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제 존재가 중요한 상황이죠. 안정을 원한다면 페네르바체에 계속 남는 게 맞아요. 그러나 마음 한켠에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다른 리그, 다른 시스템을 경험하는 게 궁극적으로 제 배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거죠.”
김연경은 오래 전부터 다른 나라의 리그들, 또 터키의 타 구단으로부터 지속적인 영입 제안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리그, 중국, 일본 등 줄곧 ‘러브콜’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다들 제가 페네르바체와 계약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저로선 고맙고 행복한 고민인 셈이죠.”
(2014년 김연경은 페네르바체와 2년 재계약을 할 당시 러시아리그로부터 20억 원에 이르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경은 페네르바체와의 재계약을 선택했다. 페네르바체의 적극적인 잔류 요청과 2년간 이어졌던 소속 분쟁 해결에 페네르바체가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김연경의 해외 진출 출발점은 일본이었다. 2009년 5월 17일 소속 팀인 흥국생명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여자 배구 팀 JT 마베라스와 2년 계약을 맺음으로써 프로 배구 출범 이래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1호 선수가 되었다.)
김연경에게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멋진 은퇴’라고 답했다. 벌써 은퇴를 거론하느냐며 놀라는 팬들도 있겠지만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때 떠나고 싶은 게 선수의 진심이고, 은퇴 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개인적인 궁금증이라고 풀어냈다.
“이번에 대표팀 들어와서 보니까 제 위에 (황)연주 언니 말고는 한 명도 없더라고요. 그만큼 대표팀의 세대교체가 빨리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겠죠. 언젠가는 제가 제일 나이 많은 선수가 돼 있겠죠? 배구하면서 ‘은퇴’를 떠올린 적이 없는데 올시즌에는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네요. (은퇴) 시기보다는 언제, 어떻게, 그리고 그 후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현역 선수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뛰는 거예요. 그래서 선수로서 버킷 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으로 복귀 후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멋지게 코트를 떠나는 것입니다(웃음).”
두 선수와 각각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이재영은 자신이 말한 대로 김연경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했다. 용기를 내 쳐다봤다가도 웃음을 터트리며 쑥스러워했다. 그런 후배를 김연경이 팔로 감싸 안았다. 후배의 어깨에 살포시 얼굴을 기대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김연경이 걸어간 길, 앞으로 가야 할 길. 이재영이 새롭게 걸어가야 할 길. 서로 다른 길들이 코트 위에서 반갑게 교차하며 대표팀에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진천=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