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여제' 김연경에게 궁금한 18가지 | 2017/10/23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털털하게 말하다가 ‘찡긋’ 애교 섞인 미소를 던진다. 알수록 궁금하고, 볼수록 매력적인 세계 1위 김연경과의 한 시간.
사실 김연경을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꽤 오래전부터다. 큰언니를 따라 배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줄곧 '기대주' '꿈나무'라 불리다가 2005년 프로 데뷔 첫해에 신인상,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 트리플 크라운까지 모두 휩쓸면서 '배구 여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세계 1위 선수지만 올림픽 시즌에만 빛을 발하는 게 아쉽던 터에 <무한도전> <나 혼자 산다> 등 예능 프로그램을 만났다. 반응은 뜨거웠다. 시크하지만 어딘지 친근함이 묻어 있는 말투, 겉모습과는 다른 여성스러운 면모 등은 그녀를 '대세' 반열에 올려놓았다. 대중적인 인기가 시작된 것이다.
최근엔 뷰티 브랜드 광고 모델이 됐어요. 운동선수에서 방송인으로, 이제는 광고까지 섭렵했네요.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이자 도전입니다. 그동안 광고 제안은 많았는데,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그러다가 '한번 도전해볼까?' 싶어서 응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요. 포토샵과 메이크업의 힘을 조금 빌렸습니다.(웃음)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자서전도 냈어요. 최대한 제 이야기를 많이 담으려고 했는데 잘 전해질지 걱정스러워요.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겠어요. 운동만 할 때보단 스케줄이 많아졌어요. 보통 오전 10시쯤 일어나요. 그리고 점심 식사 후 운동하러 가는 게 전부였는데, 최근엔 인터뷰며 광고며 방송까지, 스케줄이 많이 늘었죠. 그 외의 일상은 비슷해요. 방송에 출연하면서 워낙 많은 분이 알아봐주셔서 식당에서 밥 먹는 것조차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려고요. 무엇보다 변한 제 일상이 재미있어요.
방송이나 광고 외에 또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는 없나요? 어려서부터 운동만 해서 취미라고 할 게 딱히 없어요. 자전거를 타고 옆동네에 다녀올 정도로 활발하고 활동적인 아이였던 터라 만약에 배구를 안 했더라도 다른 운동을 했을 거예요. 운동 말고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조만간 피아노를 배워볼 생각이에요. 어렸을 때 잠깐 배웠는데 다 잊었거든요. 더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배워보고 싶어요.
'식빵'(김연경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XX'이라고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식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여성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식빵'이란 별명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어요. 식빵 모형 플래카드를 들고 와서 응원하는 분이 많은데,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근데 제가 꼭 '식빵'스럽지만은 않아요. 여성스러운 면모도 있답니다. 피부 관리도 하고 네일아트 하는 걸 좋아하는데 많은 분이 과격한 모습만 기억하시는 것 같아 아쉬워요.(웃음) 세 자매 중에 막내딸이라 그런지 애교도 많은데 말예요.
말이 나왔으니 물어볼게요. 김연경은 어떤 딸인가요? 덩치가 커서 그런지 귀여운 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전형적인 셋째 딸이에요. 큰언니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자랐고, 둘째 언니는 저와 큰언니 사이에서 많이 치였어요. 그래서 우리 세 자매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요. 저는 귀여움을 많이 받으면서도 강하게 키워졌어요. 아버지는 아들인 줄 알았던 제가 딸이라서 실망하셨대요. 그래서 더 아들처럼 키우셨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아버지랑 가장 친한 애교쟁이 막내딸이랍니다.
부모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은 뭔가요? 성격요.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방적으로 자랐어요. 내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웠죠. 부모님은 늘 제 편이셨고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익숙하죠. 물론 정신력도 강해졌고요. 스트레스도 잘 받지 않는 성격이에요.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다 풀어버리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회사 식구들이 조금 힘들 거예요. 저는 다 풀어버리는데 그 스트레스가 다 상대방에게 가니까요.(웃음)
부모님에게 어떤 딸이 되고 싶나요? 앞으론 용돈을 많이 드리는 딸이 될 거예요. 그동안은 용돈을 많이 못 드렸거든요.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드리기 싫어서도 아니에요. 부모님이 아직 경제활동을 하고 계시니까 필요 없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기념일에 5만원씩 용돈을 드리는 제게 친구들이 '독하다'고 하더라고요. 딸이 주는 용돈은 수입과 별개라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웃음)
소소한 이야기 끝에 '배구'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왔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더 반짝거리는 눈빛 하며 목소리까지, 세계가 왜 김연경을 주목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선수로서 그녀를 들여다보자. 포지션은 레프트 포워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170cm도 안 될 정도로 키가 자라지 않아 중학교 3년 내내 교체 멤버를 전전하다가, 고등학교 진학 이후 키가 20cm 이상 자라며 1학년 겨울부터 레프트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현재 중국 여자 프로배구 리그의 클럽인 상하이 구호우아라이프 소속으로 뛰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뭔가요? 2012년에 FA 자격 취득 조건을 놓고 흥국생명과 갈등이 있었어요. SK로 옮기려고 했지만 의견이 달라 여의치 않았죠. 각종 논란과 의혹이 불거졌어요. 선수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힘든 게 체력적으로 힘든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후배들에겐 어떤 선배인가요? 솔직해요. 너무 솔직해서 싫은 선배죠.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혼내고, 잘하면 칭찬하고, 재미있는 게 있으면 같이 장난도 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배예요. 너무 솔직하게 다 말하다 보니 후배들은 불편할 거예요. 잔소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고요. 사실 요즘 들어 '어떤 선배가 좋은 선배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려고요.
그렇다면 선배들에겐 어떤 후배인가요? 후배들보다 선배들과 더 친해요. 선배들이 늘 이렇게 말해요. "내가 네 선배라서 다행이야"라고요. 제가 좀 드세긴 한가 봐요. 그래도 선배들한테는 깍듯한 후배예요. 가장 친한 선배는 은퇴 후 SBS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사니 언니! 서로의 비밀을 다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예요.
사람들에게 어떤 '김연경'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국 배구를 이끌었던 선수로 남고 싶어요. 코트 안에서는 파이팅 넘치는 열정적인 선수이고 싶고, 코드 밖에서는 한국 배구를 위해 열심히 뛰는 본받을 만한 선수가 되고 싶어요. 먼 훗날에는 지도자로 활동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직은 코트 위에서 뛰고 싶어요.
곧 선수촌에 입성한다고 들었어요. 태국 나콘빠톰에서 열리는 세계여자선수권 아시아 예선전에 출전하기 위해 선수촌에 들어가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대회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모든 선수들이 들어와서 열심히 할 거예요. 세계선수권대회 본선 티켓을 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아직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요. 2020 도쿄올림픽이라는 큰 무대가 기다리고 있죠. 도쿄에 가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선수들을 잘 이끌어가겠습니다. 솔선수범하는 김연경이 될게요. 지켜봐주세요.
약 20년을 배구 선수로 살아온 그녀가 이제는 한국 배구 발전에 앞장서려고 한다. 그 첫 번째 행보는 지난달 대한민국배구협회의 부실한 대표팀 운영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면서 시작됐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필리핀으로 출국하면서 "흥국생명 이재영 선수가 이번에 대표팀에 합류했어야 했다.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라고 쓴소리를 남기면서 논란이 불거진 것. 김연경의 의도는 이재영 선수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대표 선수의 관리와 인재 발굴 및 육성 시스템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이었다. 원정 경기 시 통역의 부재, 대표팀 선수 중 절반만 비즈니스석에 타고 나머지는 이코노미석에 앉아서 가는 '반비즈니스 논란' 등 그동안 한국 배구의 환경은 열악했다. 한국 배구의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는 것을 통감한 김연경은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어린 선수들에게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소년 배구대회(김연경컵 유소년 배구대회)를 개최했다. 그녀의 표정은 비장했다.
최근에 한국배구협회에 대한 지적으로 논란이 됐어요. 그 결과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해당 경기의 성적이 좋지 않았죠. 이재영 선수를 비난한 게 아니었어요. 엔트리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해 경기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출전해야 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거였죠.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배구… 답이 안 보여요.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15년 전과 지금,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요. 비즈니스석은 바라지도 않아요. 호화로운 회식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체계화된 시스템 구축이 시급해요. 당근은 주지도 않고 채찍질만 하는데 팀 분위기가 좋을 수가 있겠어요? 예전엔 선배들,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돼요. 저도 팀을 이끌고 가야 하는 주장으로서 지금까지는 '긍정적으로 해보자!' 했지만 올해부턴 그것마저도 힘들어지더라고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꿈나무 육성이 가장 중요해요. 새 얼굴이 없으니 기존 선수들만 출전하고, 그러다 보면 개인 역량도 떨어지게 마련이죠. 근데 그건 너무 큰 바람인 것 같고, 당장 대표팀만이라도 잘 운영됐으면 해요. 엔트리를 꽉 채워서 함께 훈련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요.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 영향력을 키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오늘 대회도 그 일환이겠네요. 맞아요. 국가대표로 뛰면서 '내가 뭘 하면 배구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결국 유소년 층이 단단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죠. 지난해 수원전산여고에서 열린 유소년 클리닉에서 어린 선수들이 프로 선수들과 이야기하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어린이들이 친근하게 배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6~7개월 동안 준비했어요. 참가비도 받지 않고, 숙식도 제공해요. 첫 회인데도 10개 팀이 참가했고, 감사하게도 많은 후원사들이 도움을 줬죠. 무엇보다 휴일인데도 시간을 내어준 동료 선수들에게 감사해요.
유소년 선수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일단 아이들이 밝아요. 승부욕이 넘쳐 우는 아이도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때 운동하던 생각이 나더라고요. 취미로 하는 아이들인데도 잘해요. 눈여겨본 선수들이 꽤 있어요. 신체 조건이 좋은 선수도 있고요. 어린 선수들이 배구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게 고맙고 뿌듯합니다. 이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엘리트 선수로 자란다면 한국 배구도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요?
방송 활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도 대중적인 영향력을 키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어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처음엔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방송에 출연했는데, 어느 순간 유명해진 저 때문에 배구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더라고요. 비인기 종목이던 배구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방송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수원에서 열린 그랑프리대회는 평일이었는데도 전석이 매진됐어요. 물론 저 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게 아닐까요?
최고가 되려 하기보단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최고의 자리가 주어지는 법이니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던 김연경이 최고라 불리는 이유다.
우먼센스 2017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