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인터뷰

‘네트 위의 여제’ 김연경 | 2014/05/26

김연아가 ‘빙판 위의 여제’라면 김연경은 ‘네트 위의 여제’다. 그녀는 세계 여자 배구 랭킹 1위로, 특유의 강스파이크는 여지없이 상대를 곤두박질치게 한다. 한 경기에 혼자 30득점이나 따내는, 그녀의 경기는 늘 ‘원맨쇼’다.

 

 

잘생겼다, 김연경

김연경(26)을 실제로 보니 크다보다 ‘길다’라는 표현이 맞았다. 잘생긴 마스크를 포함해 가늘고 긴 그녀의 체형은 운동선수라기보다 모델에 가까웠다. 어디서 그런 강스파이크의 힘이 솟는 걸까? 그녀가 현재 선수로 뛰고 있는 터키 클럽인 페네르바체에서 펼치는 활약은 참으로 눈부시다. 2013/14시즌 유럽배구연맹(CEV)컵에서 대회 MVP와 득점왕·공격상·서브 1위를 싹쓸이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최근에 시즌이 끝난 터키 슈퍼컵에서도 득점왕·공격상·서브 1위 등 3관왕에 올랐다. 누군가는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자주 등판하는 그녀를 보고 ‘노예’라고도 하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쉬는 날도 없이 풀타임 주전 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이번 시즌은 정말 길었어요. 대부분의 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하려니 경기를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웃음). 간혹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감독님이 한 번씩 빼주시긴 했지만요. 시즌을 마무리해도 막상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다음날 또 운동하러 가야 할 것 같고. 긴장감이 쉽게 놓이지 않더라고요. 한국에 오니 이제야 좀 풀리네요.”

 

일단 가장 먹고 싶었던 엄마의 김치찌개와 찜닭을 원 없이 맛봤다. 딸 셋 중 막내인 그녀의 신장은 조부모, 부모에게 물려받은 큰 자산이다.

 

“일단 엄마의 키가 170cm고요. 외할아버지가 190cm에 육박하셨어요. 친할아버지 또한 180cm가 넘으셨고요. 그래서 저보다 먼저 배구를 했던 첫째 언니는 180cm가 넘고 둘째 언니도 175cm예요.”

 

배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큰언니가 운동할 때 따라다니며 공을 줍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구를 접하게 됐다. 정작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현재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평범한 직장인이다.

 

“언니가 선수가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제가 끝까지 하게 됐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가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때예요. 그때 잘 넘기면 되는데 언니는 접었죠. ‘조금만 더 할걸’ 하고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해요(웃음).”

 

그래도 세계적인 선수인 동생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흐뭇할까. 그녀는 오랜만의 휴식에 가족 여행도 계획 중이란다.

 

 

터키에서의 생활

터키는 여자 배구 강국이다. 그 안에서도 그녀가 소속돼 있는 페네르바체 유니버설은 배구뿐 아니라 축구팀, 농구팀도 있는 규모가 큰 구단이다. 팬 층도 두텁고 선수들에 대한 처우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좋은 선수와 감독을 영입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아요. 리그 수준도 세계적으로 알아주거든요. 제 기량을 보여주고 열심히 뛰는 것이 우선이지만 반대로 제가 그들에게 자기관리법이나 기술 등 배울 점도 많아요.”

 

타지 생활하는 데 큰 외로움은 없었다. 팀 동료들과는 많이 친해져 돈독히 지내고 영어는 물론 터키어도 꽤 늘었다. 가끔 만나는 한국 교포 팬들은 늘 아낌없이 응원해준다.

 

 

“한국 분들은 저만 보면 뭔가 해주시려고 해요. 교포뿐 아니라 비즈니스로 장기 체류하시는 분들은(터키에는 국내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다) 시합이 있는 날이면 꼭 보러 오시고 제게 김밥도 싸서 주시니까 든든한 힘이 됐죠.”

 

터키 여자 배구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해 경기가 있는 날이면 폭죽을 터뜨리는 등 심하게 적극적인 팬들의 응원도 볼거리다. 특히 아저씨 부대들이 많다고. 그녀는 팬들 사이에서 ‘킴’이라 불리며 인기 선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국만큼 열광적인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특히 제가 소속한 클럽은 다양한 스포츠 구단이 있어서 클럽 자체에 팬 층이 두터워요. 후원자들도 많고요.”

 

큰 신장을 갖고 있지만 마른 체형의 그녀가 힘과 탄력을 무기로 장착한 서양 선수들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미 출신 선수들은 정말 체력이 좋아요.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때도 제가 5를 한다면 두 배인 10을 거뜬히 하죠. 뛸 때도 탄력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져요. 그렇지만 배구는 힘이나 점프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술이 첫째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경기를 이끄는 것엔 자신이 있어요.”

 

김연경은 비록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이 생기지 않는 체질이라 말랐지만 숨겨진 속(?) 근육은 튼실하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그녀의 강력한 공격력의 원천이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일은 의상이었다. 192cm의 아가씨가 소화할 수 있는 국내 브랜드의 의상이 과연 있을까? 남자 의상을 준비해야 할까? 의심 많은 기자는 “웬만하면 다 맞을 거다”라는 매니저의 말도 믿지 못하고 촬영 전에 김연경 본인과 통화를 했다. “팔이 길어서 그렇지 여자 옷도 맞는다”라는 간절함마저 묻어나는 그녀의 말, 사실이었다. 모든 옷들이 보기 좋게 맞았고, 카메라 안에서 그녀는 매우 멋진 피사체였다.

 

“바지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어서 유럽에서 사요. 그곳에서도 많이 입어봐야 맞는 걸 찾을 수 있죠. 제 입장에서 잘 맞으면 곧바로 ‘어머,이건 사야 해’ 하고 구매하죠.”

 

치마는 입어본 적이 별로 없다. 파티 문화가 있는 유럽에 진출해서야 원피스를 가끔 입기 시작했다. 막상 입어보니 바지보다 편하고 어울리기도 해 놀랐단다.

 

“한국에서는 중요한 시합이 끝나면 고기를 구워 먹으며 회식을 하지만 터키에서는 와인 파티를 해요. 선수들은 그날 머리 손질과 풀 메이크업을 하고 참석하죠. 그들은 시합하는 날에도 메이크업을 하는 걸요. 처음에는 ‘운동은 안 하고 꾸미러 왔나’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좋아 보이더라고요. 경기는 선수가 돋보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잖아요. 로션만 바르고 나왔던 저도 이제는 비비크림 정도는 챙겨 발라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해 보여서 요즘은 아이라인도 좀 그려볼까 생각 중인데요(웃음).”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에 비해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소박하다. 패한 날이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여유를 찾는다.

 

“마음이 복잡해질 때는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한국 인기 프로그램을 봐요. 막 웃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해외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즐거움이에요. 전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몸은 터키, 마음은 한국

몸은 터키에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한국을 향해 있다. 특히 안산 출신인 그녀는 이번 세월호 사태가 남일 같지 않다.

 

“터키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게다가 저희 집이 안산시 단원구에 있고, 단원고등학교는 집 근처예요. 희생자 중에는 직접적인 지인은 아니지만 건너 아는 분도 있어 정말 충격이 컸어요.”

 

터키에서 비보를 접한 후 그녀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모든 경기에 임했다. 플레이오프 결승 1차전에서는 그녀의 제안으로 같은 팀 선수들이 검은 리본을 달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 하고 싶었어요. 선수들도 흔쾌히 검은 리본을 달고 열심히 뛰어줬어요. 다들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더라고요. 고마웠죠.”

 

작년 그녀의 전 소속팀인 흥국생명과의 분쟁으로 선수 생활이 여의치 않을 때 팬들 중에는 차라리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극기’만 보면 불끈불끈 힘이 솟는 열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태극 마크를 달면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아무리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은 해외팀이라도 그곳에서의 경기는 마치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태극기만 보면 애국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막 샘솟아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귀화는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어요.”

 

분쟁 당시 한국배구연맹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소속팀인 페네르바체가 스포츠 국제법을 적용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기에 그녀는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올해 김연경을 영입하려는 해외 구단의 20억 연봉 제안을 거절하고 페네르바체와 2년 재계약을 한 것도 구단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아쉬운 부분이 많아요. 금방 풀릴 문제였는데 너무 길게 끌었어요.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의 문제가 될 수 있어 안타깝죠. 구단이 원하면 쓰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선수들을 대할 때가 많아요. 선수들의 권리를 보다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년 소속팀과의 분쟁은 그녀에게 심각한 악재였다. 그로 인해 거의 훈련을 못했기 때문이다. 한창 운동하는 선수들은 며칠만 쉬어도 몸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고 말한다.

 

“살이 잘 안 찌는 편인데 스트레스 때문인지 체중이 5, 6kg 금세 불더라고요. 몸은 무척 무거워졌고요. 원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살이 찌면 나중에 웬만큼 운동해서는 빼기 쉽지 않아요. 정말 터키에 와서 운동을 두 배, 세 배 더 열심히 했어요.”

 

그녀의 목표는 오는 9월에 열리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지난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홈팀인 중국에 밀려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던 일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번에 잘 준비하면 금메달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이번엔 저희가 홈팀이잖아요(웃음). 부상당한 어깨와 무릎 치료에 집중하고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6월부터 운동을 시작할 거예요.”

 

성공한 이들의 특징이겠지만 운동에 대한 그녀의 욕심도 만만치 않다. 앞으로 10년 더 열심히 선수 생활을 하며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2020년 일본 도쿄 올림픽까지 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도 현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서른 중반의 선배들을 보면 관리하기 나름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자신이 목표에 대해 얼마나 간절한가에 따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선수 생활을 최대한 길게 하고 싶거든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간과할 수 없는 결혼과 출산은 그녀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아니다. 뭐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작정이다.

 

“결혼은 아직 젊으니까 언젠가 인연이 나타나겠지요. 해외 선수 중에는 아이를 낳고도 복귀하는 분들도 있으니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요. 결혼 상대도 한국인이 아니면 좀 이상할 것 같았는데, 터키에서 생활하다 보니 서양 남자도 매너 좋고 나쁘지 않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요. 점점 오픈 마인드가 돼가는 거죠(웃음).”

 

터키에서 남자친구들은 많이 생겼지만 아직 연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다. 김연경은 마치 새장을 빠져나온 새처럼 하늘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기만 한다. 또 한 명의 월드클래스 여제의 힘찬 날갯짓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따름이다.

 

레이디경향 2014년 6월호

글 이유진 기자 | 사진 박재찬

 

‘네트 위의 여제’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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