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배구를 춤추게 만든 김연경의 꿈 | 2017/08/24
배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김연경' 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 그는 한국 여자배구의 자부심이다.
한국 여자배구는 2005년 프로배구 출범 당시만 해도 남자부 대결에 앞서 열리는 ‘오프닝 경기’쯤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불과 10년 만에 여자배구가 남자배구는 물론 ‘겨울 스포츠의 제왕’ 남자농구의 지위까지 위협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여자배구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는 데는 ‘배구계의 호날두’라 불리는 김연경(29·중국 상하이)의 힘이 컸다.
김연경은 2005~2006시즌 프로배구 데뷔 때부터 국내에선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 기량을 발휘했고, 해외 무대에 진출해서도 일본(2010~2011)과 터키(2011~2017) 리그를 평정했다.
‘배알못’도 반하게 만든 걸크러시
실력으론 일찌감치 세계 정상을 자랑했던 김연경이 ‘배알못(‘배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줄임말) 여성’까지 사로잡으며 배구의 인기를 끌어올린 계기는 지난해 8월 열린 리우올림픽이었다.
주장으로 나선 김연경은 유럽 장신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뚫어내는 호쾌한 스파이크로 득점을 쏟아냈다. 배구 규칙을 잘 모르던 여성들도 그의 화끈한 세리머니에 반했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그는 공격에 성공하면 체육관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환호성을 내지르는 등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땐 거침없이 비속어를 내뱉기도 했지만, 팬들은 이마저도 “멋있다”고 했다. 한국은 4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김연경은 ‘걸크러시(여성이 다른 여성을 동경하고 흠모하는 감정)’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올림픽 직후 그는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터키와 한국 집에서 홀로 지내는 일상을 공개하며 더 많은 팬을 얻었다. 은퇴하는 선배 김사니(36)를 집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따뜻한 정(情)과, 집안 가득 자기 사진을 걸어 놓는 자기애 등 코트 밖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내숭 없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반했다”고 입을 모았다.
올림픽과 예능을 통해 김연경의 매력에 빠진 팬들이 대거 배구에 관심을 보이면서 덩달아 여자배구가 중흥기를 맞았다. 지난 7월 21~23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조별리그전은 김연경이 이끈 배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연일 만원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은 흡사 남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장 같았다. 관중의 70% 이상이 여성이었고, 김연경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경기장에 곳곳에 내걸린 응원 플래카드는 온통 김연경을 향한 메시지였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이후 3년 만에 국내 무대에서 뛰는 김연경을 보러 온 여성 팬들은 여중생부터 30·40대 직장인, 50대 주부까지 나이와 직업이 다양했다. 이들은 김연경의 매력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와 리더십, 남자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강인함 등을 꼽았다. 리우올림픽을 계기로 김연경의 팬이 됐다는 직장여성 남정민(29)씨는 “꾸밈없이 털털한 성격과 세계 정상급 능력을 갖춘 그를 보면 남자에게선 느낄 수 없는 어떤 동경의 감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주부 이진남(53)씨는 “일부 프로 선수들은 다쳐서 몸값이 떨어질까 봐 국가대표 차출을 꺼리기도 하는데, 김연경은 소속팀보다 태극마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고 했다.
수원에서 국내 팬들의 뜨거운 응원 열기를 접한 김연경은 인기가 실감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기대보다 훨씬 많은 팬이 연호해주셔서 처음엔 조금 민망하기도 했는데 경기 땐 정말 큰 힘이 됐다”며 “여성 팬들이 더 의리가 있다. 남자 팬이 적다고 섭섭할 건 전혀 없다”고 했다.
해외서 더 유명한 ‘세계 3대 공격수’
여자배구의 달라진 위상은 올해 초 남자 프로농구와 같은 날 치러진 올스타전에서도 확인됐다. 배구와 농구는 1월 22일 열린 올스타전을 앞두고 온라인 팬 투표를 진행했다. 이 기간 배구는 9만4673명이 투표하며 농구 투표자 수(8만3837명)를 앞질렀다. 젊은 팬층이 많다고 알려진 농구의 올스타 온라인 투표 수가 배구에 밀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TV 시청률에선 여자배구가 농구를 넘어선 지 오래다. 장소연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여자배구가 지난해 리우올림픽에서 김연경이 보여준 활약을 계기로 전 국민적 관심을 받은 덕에 V리그에도 새로운 팬이 많이 유입됐다”고 했다.
러시아의 타티야나 코셸레바(29·터키 엑자시바시), 중국의 주팅(23·터키 바키프방크)과 함께 ‘세계 3대 공격수’로 평가받는 김연경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터키 페네르바체에서 뛸 때는 소속 팀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김연경만을 위한 응원 구호가 있을 정도였다. 그가 서브를 넣을 때마다 팬들이 “킴(Kim)! 킴! 킴! 킴!”이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외쳤다. 열성적인 걸로 소문난 페네르바체 팬들은 그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김연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팅이 2013년 국제대회에서 처음 마주친 김연경을 보고 부끄러워 눈도 못 마주친 채 그에게 사인을 요청한 일화도 있다. 일본 JT마블러스 유니폼을 입었던 시절에는 상대편 감독이 “김연경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며 극찬했다. 김연경의 연봉은 약 15억원으로 남녀 배구 통틀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김연경은 지난 시즌까지 터키 페네르바체에서 6시즌을 뛰며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계속 팀에 남아 달라는 페네르바체의 구애를 뿌리치고 그는 지난 5월 중국 상하이 여자배구단으로 이적했다. “중국 리그 일정이 다소 여유가 있으니 비(非)시즌 동안 국가대표 활동에 좋은 컨디션으로 집중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국내 팬들은 “대다수 선수가 비시즌에는 쉬고 싶어하는데, 김연경은 국가대표에 대한 애정과 책임이 남다르다”며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냈다.
김연경의 목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다. 세계 랭킹 10위인 한국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대회 동메달 이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다. 김연경은 “지금껏 한국·일본·터키 리그에서 우승도 많이 해봤고 2012 런던올림픽 MVP(최우수선수)도 선정됐지만, 이제는 세계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싶다”며 “배구 인기 상승을 위해서 내가 나설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승재 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