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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대 23에서 대역전, 불가능을 가능케 한 김연경 | 2016/12/12

'에이스의 자격'을 보여준 김연경·나탈리아, 완성형 레프트 위력 증명

 

17 대 23. 25점이면 한 세트가 끝나는 배구 경기에서 역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어려운 걸 김연경과 페네르바체가 해냈다.

 

김연경이 복근 부상에서 돌아온 페네르바체가 10일 갈라타사라이와 라이벌전에서 세트 스코어 3-1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상위권 진입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역시 전통의 라이벌다웠다. 갈라타사라이 홈 팬들은 시종일관 페네르바체 선수들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광적인 응원을 펼쳤다. 갈라타사라이는 최근 세계 정상급 선수 영입에 실패하면서 전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페네르바체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숙명의 라이벌이다.

 

특히 양 팀 팬들의 극성스런 응원전과 신경전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상대 팀 응원단의 입장을 불허하는 건 흔한 일이다. 경기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경기 도중 심판이 '더 이상 못 보겠다'며 선수들만 남겨놓은 채 퇴장해버린 일도 있었다.

 

김연경 '막판 3연속' 득점, 대역전극 마침표

 

이날 경기는 근래 보기 드문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해피 엔딩의 주인공은 단연 김연경이었다.

 

17-23으로 뒤진 4세트. 페네르바체가 세트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이었지만, 4세트를 내주고 5세트로 넘어갈 경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선 승점 3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다. 치열한 선두권 싸움에서 큰 손실이다. 분위기에 밀려 5세트마저 내줄 경우는 더 치명적이다. 김연경이 복귀했음에도 라이벌전에서 패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페네르바체의 부진이 계속되면서 올 시즌 상위권 진입을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럴 때 팀을 구하는 것이 바로 에이스의 역할이다. 위기에 빠져들자 김연경(29세·192cm·대한민국), 나탈리아(28세·184cm·브라질) 두 '레프트 쌍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발케스타인(29세·180cm·네덜란드)이 안정적이고 까다로운 서브를 넣고 김연경이 후위에서 디그(상대방 공격을 받아내는 것)를 하자, 나탈리아가 공격에서 폭발했다. 나탈리아는 18-23에서 내리 5득점을 몰아치며 대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했다.

 

23-24. 갈라타사라이가 1점만 따내면 5세트로 넘어가는 위기 상황. 이번에는 김연경이 해결사로 나섰다. 나탈리아는 낮고 빠르게 깔려 들어가는 서브로 갈라타사라이 수비진을 흔들었고, 메르베(리베로)는 악착같은 디그로 상대방의 공격을 걷어 올렸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온 볼들을 김연경이 내리 3연속 득점에 성공하면서 대역전극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아본단자 페네르바체 감독은 김연경이 끝내기 득점에 성공하자, 코치에게 달려가 부둥켜안고 겅중겅중 뛰었다.

 

김연경 주도 비행기 세리머니, '공항 이륙장' 방불

 

왜 김연경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이자 에이스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한판이었다. 김연경은 중요한 상황에서 득점에 성공할 때마다 특유의 비행기 세리머니를 펼치며 팀 사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끝내기 득점 직후, 김연경이 비행기 세리머니를 시작하자 페네르바체 동료 선수들도 뒤따라가며 비행기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치 공항 이륙장을 보는 듯했다.

 

반면, 대역전패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갈라타사라이 홈 팬들은 비행기 세리머니를 보면서 얼름처럼 굳어져 버렸다. 최고의 에이스란 경기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경기장 분위기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는 기질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한국 지도자·선수들에게 '훌륭한 교과서'

 

이날 경기는 한국 배구 지도자와 선수들에게도 좋은 교과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 무대에서 완성형 레프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 한판이었다.

 

대역전극을 주도한 김연경과 나탈리아는 '공격과 수비력을 모두 갖춘' 세계 최정상급 완성형 레프트들이다. 나탈리아는 2016 리우 올림픽에서 김연경과 마찬가지로 서브 리시브와 디그에 참여하는 레프트임에도 브라질 대표팀의 주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새로 영입된 발케스타인도 수비를 더 잘하지만, 공격력도 만만치 않다. 발케스타인은 리우 올림픽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공격과 수비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네덜란드가 B조 예선에서 금메달 팀 중국에게 3-2로 승리를 거두는 데도 기여했다.

 

나탈리아와 발케스타인은 모두 신장이 180cm 초반으로 국내 레프트 선수들과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국내 레프트 선수가 더 큰 경우도 많다. 그러나 두 선수는 수비력뿐만 아니라 공격 파워, 빠르기, 테크닉 등이 뛰어나다.

 

이날 경기는 공격은 좋은데 수비력이 부족하거나 수비는 괜찮은데 공격력이 부족한 소위 '반쪽 레프트', 한국 배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수비형 레프트'로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이 없다는 걸 재확인한 훌륭한 교본이었다.

 

레프트가 서브 리시브와 디그를 하지 않고, 후위로 가면 수비형 레프트와 교체하는 풍토도 국내 무대에서 사라져야 하는 이유도 제시해 주었다. 김연경이 지난 8월 언론 인터뷰에서 "중·고교 시절부터 주력 공격수에게 수비를 면제해주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 세계 배구 추세에 맞게 새로운 전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V리그에서도 전광인·서재덕이라는 정상급 완성형 레프트 2명을 보유한 한국전력이 '만년 꼴찌'의 오명에서 벗어나 우승 후보로 불릴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수비형 레프트라는 '긍정적이지 못한' 단어를 쓰지 않는 게 한국 배구 발전의 첫걸음일 수 있다.

 

 

오마이뉴스 김영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