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인터뷰

"나는 김연경, 연연하지 않고 경쟁한다, 뭐든" | 2016/09/24

이번 여름 김연경은 바쁜 여름을 보냈다.

리우 올림픽 이후 TV출연, 화보 촬영, 유소년대회 준비까지 눈코 뜰 새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였다'소리 듣다가 내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세계 최고의 여자배구 선수 김연경을 만났다.

 

[Why: 올림픽 마치고 터키로 돌아간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연경]

 

 

“남자 친구 있냐, 이상형 누구냐, 결혼 언제할 거냐 같은 질문이요. 이런 것들 다 패스해도 돼요?” 배구선수 김연경(28)에게 “그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질문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며 씩 웃는다. 웃는 입매가 그야말로 큼직한 반달 모양이었다.

 

지독히도 뜨거웠던 지난 여름 끝자락, 우리는 이 서늘한 입매를 지닌 키 192㎝ 올림픽 스타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그가 리우 올림픽 코트 위에서 몸을 활처럼 휘며 스파이크를 내려 꽂으면 새벽녘 TV에 앉은 우리나라 시청자도 덩달아 전율했고,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가 주먹 쥐고 괴성을 지르면 우리도 함께 탄식했다. 그 숨가빴던 여름도 물러간 9월, 김연경은 터키 여자배구팀 페네르바체에 복귀했다. 그가 터키로 떠나기 직전인 추석 연휴 무렵에 경기 수원 김연경의 집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라고 했다.

 

김연경은 “짐을 이제 막 싸기 시작했다”고 했다. “트렁크만 큰 걸로 세 개쯤 가져가거든요. 여기에 엄마가 아이스박스 한 가득 밑반찬 싸놓고요. 싸도 싸도 끝이 없어요.” 그때였다. 한 초등학생이 다가와 “김연경 선수 언니 맞죠? 사인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 김연경은 “어, 안 돼” 하더니 다시 씩 웃었다. “언니 지금 인터뷰 중이거든. 이따 오면 사진 찍어줄게.” ‘언니’는 그렇게 팬 하나를 돌려 보내놓고는 정면을 보며 경쾌하게 외쳤다. “자, 질문요!”

 

 

휴식은 끝났다

 

―‘결혼 언제 할 거냐’는 식의 질문이 듣기 싫은 건가요.

 

“아뇨, 싫은 건 아녜요. 팬들이 궁금하다면 대답해 드려야죠. 다만 여전히 다른 질문이 더 듣고 싶긴 해요. 아시다시피 저는 운동선수니까 제 실력과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제일 좋긴 하죠.”

 

―올림픽 끝나고 나서도 계속 운동했다죠.

 

“일정이 바빠서 많이는 못했어요. 매일 2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챙기는 정도? 이거라도 못하면 정말 불안해요. 쉬고 있을 때도 숙제 안 하고 노는 아이처럼 맘이 편하지 않죠. 당장 10월 중순에 경기가 있거든요. 그때 뛰려면 지금부터 몸을 만들어놓아야 해요. 20대 초반엔 한 달씩 푹 쉬고 돌아가도 일주일 바짝 운동하면 다시 경기를 뛸 수 있는 몸 상태가 되곤 했었는데, 이제 그런 나이는 지났나봐요(웃음). 요새는 한 달 쉬면 한 달은 바짝 운동해야 몸이 회복되더라고요. 그러니 매일매일 운동 해놓는 거죠.”

 

―운동선수들이 다 그렇겠지만, 휴식이 참 짧네요.

 

“네. 가끔은 ‘아, 이걸 또 시작하는구나. 미치겠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또 웃긴 건 다시 운동 시작할 생각을 하면 설레는 것도 있어요. 어찌 됐건 경기를 시작할 생각을 하면 슬슬 피가 뜨겁고 머릿속이 윙윙 돌아가기 시작하거든요. 그게 죽을 만큼 괴롭기도 한데 또 한편으론 짜릿한 거죠. 그래서 제가 이걸 하나 봐요.”

 

―올림픽 끝나고 귀국해선 한동안 꽤 바빴잖아요. 쉴 시간 있었어요?

 

“그래도 태국에서 휴가 며칠 보냈고요. 화보 촬영도 했고. 내년에 ‘김연경컵’이라는 이름으로 유소년대회 열려고 준비도 했고, 초등학생들에게 재능기부 수업도 해보고…. 괜찮았어요. 하하.”

 

―재능기부 수업은 할 만하던가요.

 

“아뇨! 아우, 선생님들 정말 대단하세요. 두 번은 못 가르치겠던데요? 애들이 말을 너무 안 들어요. ‘자, 이리 오세요’ 이러면 저기 가서 자기네들끼리 얘기하고 있고, 한참 가르쳐 준 다음에 ‘달라진 게 있나요?’ 그러면 ‘아뇨, 똑같아요!’ 이러고요. 나중에 제가 ‘야, 너네 그럴 거면 여기 왜 왔냐?’했죠(웃음).”

 

“연연하지 않고 경쟁하는 김연경”

 

김연경은 1988년 경기 안산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딸만 둘 낳은 부모님은 김연경이 아들이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활달하고 귀여운 막내딸에게 금세 빠져들었다고 했다. 김연경이 배구를 시작하게 된 건 안산서초등학교 4학년 때다. 여섯 살 위인 큰 언니(김혜경)를 따라다니며 배구공을 만지게 된 게 인연이었다. 당시 그는 142㎝ 정도로 학교 선수 중 키가 가장 작은 편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보통 150㎝였다. 키가 작은 탓에 당시 포지션도 공격수가 아닌 세터(토스를 올려주는 역할)였다.

 

―그때 키가 작아서 배구를 포기할까 고민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더군요.

 

“고등학교 때까지 키가 잘 안 컸거든요. 아시다시피 배구에선 키가 큰 게 유리하니까 답답했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그 당시에도 그렇게까지 절망했던 건 아녜요. 제겐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가당치 않은 꿈을 꿀 수 있는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난 지금은 코트 위의 땅콩이지만, 그래도 언젠간 최고의 선수가 될 거라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이요. 그러다가 정말 고1 때 갑자기 키가 171㎝로 자랐고, 나중엔 192㎝가 됐죠. 컸다기보다 갑자기 막 늘어난 거죠(웃음).”

 

 

―그렇게 한동안 키가 작았던 덕에 오히려 수비도 공격도 다 잘하는 선수가 됐고요.

 

“그렇죠. 오랫동안 세터를 했고 리베로 훈련을 받아서 리시브랑 수비, 토스를 확실하게 익혔으니까요. 고1 때 드디어 공격수를 하게 됐고요. 고생이 다 약이 되는 거죠.”

 

―운동이 다 그렇겠지만, 여자배구도 기합이 꽤 센 운동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자세히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학생 때만 해도 체벌이 많았어요. 구타도 종종 있었고, 얼차려도 자주 받고. 큰언니가 중간에 배구를 그만둔 것도 아마 그런 걸 견디기 쉽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제가 배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중간에 그만둘 거면 시작하지 마라’고 하셨는데, 전 그래서인지 이 악물고 버텼던 것 같고….”

 

―그걸 다 견딜 만큼 좋았던 건가요.

 

“네. 그냥 다른 게 안 보일 정도? 코트에서 공을 튀기는 순간들이 다 짜릿했어요.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내가 나아지는 게 보여서 좋았어요. 매일매일 공을 끌어안고 잤고 연습 다 끝나고도 혼자 체육관에 남아서 운동했고요. 선생님이 제겐 ‘너는 좀 그만해라’고 했을 정도로요. 남들보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연경은 프로의 세계에 입문하자마자 금세 코트를 평정한다. ‘여자 김세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2005년 10월 드래프트를 거쳐 1순위로 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에 입단, 5위 팀이었던 흥국생명을 처음으로 통합 우승시켰고 정규 리그 최우수선수(MVP)와 챔피언결정전 MVP를 비롯하여 신인상과 함께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을 휩쓰는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이 됐다.

 

―어마어마했었네요.

 

“제가 봐도 그래요. 우하하. 그때 영상을 종종 돌려보거든요? 그거 보면 제가 봐도 ‘와, 저때 저걸 어떻게 했지? 저땐 저런 동작이 됐었네?’ 그래요. 그땐 정말 뭘 해도 잘 됐던 시절이었던 것 같고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내가 제일이었죠.”

 

―너무 잘나가면 시기나 질투도 있었을 텐데요.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죠. ‘건방지다’ ‘싸가지 없다’…. 그땐 근데 그런 말이 잘 안 들렸어요. 누가 뭐래도 실력이다, 실력으로 승부하면 그만이다 그랬었죠. 오히려 요샌 주위 시선 신경 쓰고 조심해요. 언젠간 내가 이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2009년 김연경은 흥국생명과 자매결연한 일본 JT 마베라스와 2년 계약을 맺고 해외에 진출했다. 일본 V리그에서 경기당 평균 24.9점을 올리며 소속팀이 정규 리그 챔피언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2010년 도레이전에서 자신의 한 게임 최다득점(45득점)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2011년엔 터키 페네르바체에 임대로 입단, MVP에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챔피언이라지만 경기는 매번 큰 스트레스겠죠.

 

“그럼요. 경기를 치를 때면 혼자 꼬박 사흘을 뛰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전날 밤잠을 못 자요. 잠을 설쳐가며 내일 있을 경기를 머릿속으로 뛰어요. 그리고 본 게임에서 죽어라고 뛰죠. 그리고 그 다음 날엔 또 어제 치렀던 경기를 혼자 복기하면서 온종일 ‘그때 왜 그랬지’ 그 생각만 해요. 엄청난 부담이죠.”

 

―털털하고 씩씩하게만 보였던 수퍼스타 김연경의 뒷모습인가요.

 

“그러게요(웃음). 한동안은 이런 압박감을 계속 지고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머리를 비우는 훈련을 따로 받기도 했어요. 기(氣) 수련 같은 거요. 눈앞에 큰 블랙홀이 있다고 생각하고, 머릿속 온갖 떠오르는 고민을 그 속으로 집어넣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 훈련을 하고 나니 아무래도 한결 홀가분해지더라고요.

 

사실 원래 고민이 많은 편이에요. 잡생각도 많고. 그래서 혼자 우울하게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해요. 터키에 있을 때도 가급적이면 혼자 집에 있기보다는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려고 하죠. 결국은 뭐든지 훈련이고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제 이름이 연경이잖아요. 가끔은 뭐든 ‘연연하지 않고 경쟁하라’고 내 이름이 ‘연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성격도 훈련의 결과물이라는 얘기인 거죠?

 

“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AB형이거든요?(‘또라이’라고 작게 속삭이더니) 우하하! 사실 예전엔 남들을 잘 이해 못 했어요. 제가 워낙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포커페이스인 친구나 잘 안 웃는 후배를 보면 ‘쟨 왜 저래?’그랬다고요. 답답해서 속 터지고. 그런데 배구는 아시다시피 정말 엄청난 팀워크의 결과물이에요.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코트에서 같이 뛸 수 없어요. 그래서 붙들고 이야기를 참 많이 해야 하거든요.

 

경기 끝날 때면 다 같이 모여서 꼭 뒤풀이하고 진실게임도 하고. 속마음 털어놓는 과정을 꼭 거치죠. 그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서로 마음 여는 법을 터득하는 거예요. 서로의 표정을 읽는 법, 서로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법…. 배구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스포츠일지도 몰라요. 와, 멋지다. 그렇죠?”

 

 

변화를 위해 발언한다

 

김연경은 2012년 터키로 간 직후 원 소속팀 흥국생명과 이적 문제로 크게 갈등을 빚었다. 김연경은 “국내 팀과는 1년 단위로 계약했기 때문에 해외 진출에 문제가 없다”고 했으나 흥국생명은 “규정이 바뀌어서 6년을 무조건 국내에서 뛰어야 한다”고 했다. 김연경은 이에 “이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대표를 은퇴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크게 대립했다. 2014년 국제배구연맹(FIVB)이 김연경에게 이적동의서(ITC)를 발급해주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당시 맘고생이 심했죠.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죠. 해외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고 많이 배우고 있는데, 왜 무조건 들어와야 하는지 일단 이해가 안 됐었고요. 당시 배구협회가 제 입장보단 구단 입장에서 대변해주는 것도 서운했죠. 그때 정말 국회의사당도 들어가고 국회의원들도 만나고, 온갖 곳은 다 돌아다니면서 미팅하고 그랬죠.”

 

―사실 그때 너무 강경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잖아요.

 

“제 문제였지만 꼭 저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했거든요. 전 터키에서 훈련받은 덕에 지금의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후배들도 앞으로 해외 이적 문제로 계속 고생할 것 같았고요. 당시에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할 것 있느냐’고 걱정하시면서도 자고 일어나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고 응원해주셨어요.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죠.”

 

 

김연경은 리우 올림픽 경기가 끝나고 배구 대표팀이 겪었던 어려움을 몇몇 인터뷰를 통해 토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배구 대표팀의 통역과 의료진이 출입증을 발급받지 못해 선수촌에 들어가지 못했다거나, 경기가 끝나고도 제대로 회식 한번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김연경은 “어찌 하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 이 사실이 먼저 알려졌고, 나중에 그걸 나에게 묻기에 답을 해줬던 것”이라면서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총대를 메더라도 솔직하게 다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배구협회 쪽에서 인터뷰한 것 가지고 섭섭해하진 않던가요.

 

“아뇨. 오히려 개선하려고 애쓰시더라고요. 대한배구협회장님(서병문)이 저희 모아놓고 회식하면서 불편한 점 다 듣고 일일이 적어 가셨고요.”

 

―솔직하게 말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지만 저는 언제나 말을 안 하고 감추는 게 모든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운동할 때도 그래요. 언니들에게도 저는 할 말 다하거든요. ‘언니, 우리 똑바로 해요’ 하면 언니들이 웃으면서 그래요. ‘야, 내가 언니거든?’ ‘알아요! 그러니까 제대로 하시라고요.’ 그러고 언니들이 ‘야, 너도 똑바로 해!’ 그러고 같이 웃으면서 넘어가요. 그렇게 쌓아놓지 않고 치워야 앞으로 나갈 수 있잖아요.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아닐까요?”

 

 

마지막까지 폼나게

 

널리 알려진 대로 현재 김연경의 연봉은 120만유로, 약 14억9000만원 정도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김연경은 “돈 관리는 작은 언니가 한다. 많이 받는다지만 내게 직접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별로 실감은 안 난다”고 했다.

 

―재테크도 하나요.

 

“네. 부동산 열심히 해요(웃음). 여기저기 다 투자해서 요샌 잔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자꾸 사람들이 ‘너 돈 많이 버니까 좀 쏘라’고 해서 괴로워요(웃음).”

 

―용돈은 어디에 쓰죠.

 

“운동화가 한 백 켤레 돼요. 신발 사는 데 쓰고, 제가 보기와 다르게 화장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틈나는 대로 반신욕하고 보디 스크럽하고, 피부관리 받고, 혼자 기초화장하고. 그러면서 스트레스 풀거든요. 그런 소소한 곳에 돈 쓰죠.”

 

―돈을 정말 많이 번다면 뭘 하고 싶어요?

 

“글쎄요, 저는 그래도 계속 운동할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번다는 건 그만큼 최고라는 뜻이니까, 인정받았으니까 됐다 하고 또 운동할 것 같은데요?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최고’라는 소리만 듣다가 내려오고 싶어요. 그게 이룰 수 없는 욕심이라 해도 할 수 없어요. 정말로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로 폼나게 뛰다가 코트에서 내려오고 싶어요.”

 

―부모님이 웬만하면 앞에 나서지 않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사실 매니저처럼 뛰는 운동선수 부모님도 많잖아요. 저희 부모님은 정말 그림자처럼 도와주셨죠. 제게도 늘 ‘자연스럽게 살라’고 하시고요. 어릴 땐 사실 좀 서운했어요.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좀 극성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커서 보니 이런 부모님 덕에 제가 오히려 더 자유롭고 저답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거침없고 사심 없는 저, 김연경이요.”

 

―운동선수가 안 됐다면 뭘 했을까요.

 

김연경이 갑자기 혼잣말을 했다. “응? 어려운데….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한참 그렇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정말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어려워서 답을 못하겠네요. 모르겠어요.” 그 “모르겠다”는 말이 아주 근사하게 들렸다. 어디선가 슬쩍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