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ento Post KIM! (모멘토 포스트 킴 - 김연경 이후를 기억하라) | 2017/09/02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막걸리를 앞에 놓고 배구인 두 분과 마주 앉았습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된 분, 장도(壯途)에 오를 분과 저간의 안부를 묻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자리를 같이 한 누군가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그날 기계음에 불과한 전화벨 소리에도 ‘감정이 실리는구나’라고 처음 느꼈습니다. 짜증스럽게 울리더군요. 통화의 주인공이 ‘방금 한국여자 대표팀이 태국에게 완패를 당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느냐? 한심스럽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앞으로 어쩔 것인가?’라며 한탄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전해졌습니다.
한국 배구가 변방으로 밀려난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남자배구는 2000년 시드니 대회 이후 올림픽에 나섰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2020 도쿄올림픽에 나갈 길도 멀고 험난해 보입니다. 아시아권에서도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이란에게 정상자리를 내주고 3~4위권에 그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에게는 한 수 아래입니다. 올림픽사상 구기종목에서 최초로 메달(1976 몬트리올대회)을 획득했던 여자팀은 애처롭게 고군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이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듯합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어쩌면 천운과 같은) 김연경 덕분에 2012 런던-2016 리우 올림픽에서 메달권 진입이란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팀에게 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연경(뿐)이라는 사실이랍니다. 그에게만 매달리고 그만 바라볼 뿐입니다. 그가 없는 여자배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최근 마친 아시아 여자선수권대회(필리핀)에서 한국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필리핀 베트남을 김연경이 투입돼서야 가까스로 제압했고, 급기야 태국에게는 완패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한국 여자배구가 전성기를 누리던 1990년대 중반. 필자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월드그랑프리가 열린 태국 필리핀 등지에 동행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은 강호 중국에 치이기는 했지만, 일본에게만은 절대 우위에 있었습니다. 기억 한 가지. 한국은 작심하면 일본에 15-0 퍼펙트 세트승(당시 사이드아웃제)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감독 김철용은 상대를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고, 감독 의중을 알아챈 장윤희는 (손목을 틀어) 1점을 헌사 했습니다.(경기를 마친 뒤 한국팀 ○단장은 자신이 일본에 0-15로 진 적이 있는데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수 년이 걸렸다며 15-0으로 몰아붙였어야 했다고 웃으며 주장했습니다.)
이런 한국팀 모습을 태국 소녀선수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태국은 그간 한국을 배우자며 20년 넘게 투자하고 각종 대회를 유치하며 배구를 육성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시아 제패를 노리며 태국은 2년 주기로 열리는 아시아 선수권대회는 5번,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는 7번 유치했습니다. 한국은? 한 번도 없습니다.
김철용 표(表) 배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단신 선수들로 철저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빠른 배구? 혹독한 훈련? 종교의 힘? 김 감독 지도 아래 무진 땀을 흘렸던 장윤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배구.” 리시브를 제대로 해야 세터가 편히 볼을 올릴 것이며, 세터가 정확히 볼을 띄워야 공격수가 자신 있게 볼을 때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 모두가 한 발 더 뛰어야 하고, 더 뒹굴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선수들이 왜 힘들게 희생하며 훈련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최근 태국 베트남 배구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는데, 정작 한국팀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김연경이 만능은 아닙니다. 2012 런던 올림픽 때만 해도 김연경은 한국팀의 부족한 부분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지쳐있습니다. 그도 서른입니다(히로시마에서 금메달을 딸 때 장윤희는 25세). 언젠가는 김연경도 어쩔 수 없이 정점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김연경 공격부담을 나눠 질 수 있는 사이드 키커(side-kicker 믿을 만한 친구)를 빨리 찾아 키워야 합니다. 한국 여자배구가 부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고대 로마제국 시절.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황금 월계관을 받아 들고, 화려한 개선(凱旋) 행사를 벌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환호와 갈채를 보냅니다. 개선장군이 탄 황금마차 뒤에는 노예 한 명이 따라다니며 반드시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한국여자배구는 “모멘토 포스트 김!”을 외쳐야 할 때입니다. 김연경 이후를 기억하라!
편집장 김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