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인터뷰

우리가 몰랐던 김연경 이야기 | 2016/02/01

[더스파이크=정고은 기자] 김연경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녀에게 배구란 무엇이냐고. 그러자 돌아온 건 뻔한 답변. “삶이에요. 쉬더라도 배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 삶에서 배구가 떠나갈 수는 없어요. 은퇴를 하더라도 배구에서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구는 계속 제 삶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뻔하지 않았다.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월호에 개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Prologue 꼬마소녀, 배구와 만나다

‘배구계의 메시’라고 불리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배구 여제 김연경. 그런 그녀도 배구를 시작하게 된 데에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배구를 시작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 4학년. 큰 언니가 배구를 하고 있었다. 언니를 따라다니며 구경도 하고 공도 주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배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배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Story 1 전화위복 轉禍爲福

지금 그녀 키는 192㎝. 어렸을 때는 정말 키가 작았다. “처음 포지션은 세터였어요. 중학교 1학년 때도 세터를 했었는데 키가 작아서 경기는 잘 못 뛰었죠. 그러다 갑자기 포지션이 바뀌었어요. 리시브를 전담하는 라이트 공격수도 하다가 레프트 자리에 공백이 생기면 리시브하러 들어가기도 하고 또 세터도 보고. 왔다 갔다 했어요. 하지만 경기는 여전히 많이 못 뛰었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키가 커야 하는 센터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에 불려 다녔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한번은 3학년 언니가 다친 거예요. 리시브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가 뛰게 됐죠. 그렇게 1학년 말쯤 자리를 잡고 지내다 보니, 키가 자라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15-20㎝가 크더라고요.” 김연경의 말이다.

 

자라난 키만큼 배구 인생도 활짝 피기 시작했다. 2004년 제12회 아시아 청소년 여자배구 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발탁되며 생애 첫 국가대표라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제9회 세계 유스 선수권대회에서 활약하며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고 2년이던 그녀에게 여자배구 관계자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배구계는 프로출범을 선언한 뒤였다. 팬들과 매체들 관심을 끌어줄 새로운 스타가 필요했고 때마침 대형 유망주 김연경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여자배구는 꼴찌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즌 최하위를 차지한 팀이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얻기 때문이었다. 1순위로는 김연경이 일찌감치 낙점된 상황이었다. 이후 한국배구연맹은 드래프트 제도를 손질했다. 유리한 드래프트 순번을 차지하려 고의로 패배하는 경기를 사전에 막기 위해 확률추첨 제도를 도입했다.

 

꼴찌를 차지하며 행운의(?) 주인공이 된 건 흥국생명이었다. 2005-2006시즌 흥국생명은 김연경을 품에 안았다. 여제를 잡은 흥국생명은 더 이상 약체가 아니었다. 한 해 먼저 프로에 입단한 황연주와 함께 든든한 좌우 쌍포를 갖추며 단숨에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예상대로 챔피언 결정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김연경은 신인으로서 이례적으로 신인왕 뿐만 아니라 정규시즌과 챔피언결정전 MVP를 휩쓸었다. 그녀 역시 “신인이 신인상과 MVP를 수상한 경우는 저밖에 없어요”라며 웃어 보였다. 왜 모든 구단이 이토록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작은 키로 한 때 배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그녀. 하지만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녀가 있을 수 있었다. “여러 포지션을 경험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지금 리시브하는 것도 그 때 리시브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이죠.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 키가 컸던 애들은 선생님이 리시브를 안 시켜요. 공격하고 블로킹만 해요. 그러다보니 리시브가 약할 수밖에 없죠. 그러면 반쪽 선수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키가 크면서도 안정적 리시브가 가능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선수가 드물거든요.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죠.” 김연경의 말이다.

 

 

Story 2 해외진출을 꿈꾸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선수가 코트에 안겨준 충격은 컸다. 그리고 한국배구연맹은 남자부에 이어 2006-2007시즌부터 여자부에도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했다. 이 때부터 김연경은 해외진출에 대한 꿈을 꾸게 됐다.

 

“외국인 선수들과 같이 뛰는데 한번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나라 선수들은 왜 해외에 나가서 뛰지 못할까.’ 그리고 국가대표로 해외에 한 번씩 가게 되면 다들 자기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서로 친하더라고요. 그 때 우리 한국선수들만 아무도 모르고 구석에 있는 느낌을 받았죠. 왜 우리나라 선수들은 해외에 못 나갈까 생각하다 보니까 그 때부터 해외리그에 조금씩 관심이 생겼어요. 나도 좋은 리그에서 좋은 선수들과 뛰고 싶다는 꿈을 꿨죠.”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꿈은 곧 현실이 됐다. 김연경은 2009년 5월 17일 소속 팀인 흥국생명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여자 배구 팀 JT 마베라스와 임대계약을 맺었다. 김연경의 해외진출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존 선수들의 무시와 텃세를 감내해야 했다. 김연경은 “제 선택에 후회하기도 했어요. 일본 애들이 무시하기도 하고 텃세도 많이 부렸죠. 한국이 일본에는 조금 약했어요. 그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제가 외국인선수인데 자기네한테도 지는 나라에서 온 선수라고 하니까 못 미더웠겠죠”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래도 제가 잘하니 나중에는 인정해주더라고요”라며 웃었다.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얻은 것 또한 있었다. “일본은 개인 운동을 많이 해요. 다른 팀들은 팀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제가 속한 팀은 개인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많이 줬어요. 그래서 자신한테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할 수 있었죠. 저 또한 제가 안됐던 부분들을 많이 연습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을 거쳤던 것이 좋은 생각이었던 셈 이에요. 사실 이탈리아에서도 영입제안이 있었거든요. 일본에서 경험이 좋은 배움이 됐어요.”

 

그리고 김연경은 일본을 떠나 터키리그로 발걸음을 돌렸다.

 

Story 3 정상에 서기까지

이미 해외리그를 경험한 그녀지만 터키는 또 달랐다. 아니, 모든 것이 달랐다. 터키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느꼈다. “이스탄불에 왔는데 사람들이 히잡을 쓰고 있는 거예요. 이슬람문화잖아요. 저로서는 처음 접해보는 문화였죠. 새로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러다보니적응하는데 애를 먹었죠. 특히 언어적인 부분에서 힘들었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문화 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운동하는 스타일이나 선수들도 그 전과 확연히 달랐다. 외국인선수로서 받는 서러움도 있었다.

 

김연경은 “첫 해에는 동료 선수들이 저한테 말도 잘 안 걸었어요. 공도 잘 안올려줬고요. 무시하는 게 있었죠. 서러움 많이 당했어요”라며 힘들었던 시간들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그런데 제가 잘하니 상황이 바뀌게 됐어요. 제가 오히려 얘들 무시했죠(웃음)”라며 넘겼다.

 

누군가는 힘들다고 포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연경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그 시간들을 버텨냈다. 그리고 그 버팀은 헛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김연경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루었다. 입단 첫 해였던 2011-2012시즌 페네르바체는 유럽배구연맹(CEV)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MVP는 김연경 차지였다. 2013-2014시즌에도 CEV컵 대회 우승과 MVP를 수상했다. 그리고 2014-2015시즌에는 4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김연경으로선 터키에서 처음 맛본 리그 우승이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리그 3관왕(최우수선수상·스파이커상·득점상)에 올랐다. 그야말로 터키리그를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5시즌 째를 맞고 있다. 숨가쁘게 달려왔을 시간에 대한 김연경의 감회 또한 남다를 터.

 

그녀는 “많은 일들이 있었죠. 흥국생명하고 분쟁도 있었고 여러 가지 힘든 부분들도 있었고요. 처음에 갈 때만 해도 제가 주전으로 뛸 수 있을까라는 걱정으로 갔었어요. 그런데 운이 잘 맞아서 경기를 뛸 수 있었고 우승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기회와 운이 있었죠. 좋은 선수들과 뛰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좋은 리그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시간들이었죠”라며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봤다.

 

문득 궁금해졌다. 차곡차곡 쌓인 시간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 였을까. 잠깐의 고민도 없이 그녀는 이내 대답을 내놓았다. 김연경은 첫 해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사실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그럼에도 감독님이 저를 믿어주셔서 경기에 나설 수 있었고 결국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했죠. 거기다가 MVP까지 받았어요. 아직까지도 그 때 기억이 많이 나요.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해 선수들하고 얘기를 해보니 10년이 넘게 배구한 선수들도 하기 힘든 우승이라고들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처음 가서 우승을 했잖아요. 그게 참 뿌듯하기도 하고 저로서는 자부심을 많이 느껴요”라고 전했다.

 

올시즌을 끝으로 페네르바체와 계약이 만료된다. 김연경은 새로운 리그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벌써부터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 김연경은 “터키리그가 최고 리그잖아요. 그래서 우선적으로는 생각하겠지만, 모르겠어요. 제가 앞으로 유럽에서 뛰면 얼마나 뛸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터키 말고도 다른 리그에서 뛰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여러 가지 생각을 계속 하고 있어요. 터키에서 5년 동안 뛰면서 다른 리그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한데 터키리그가 워낙 좋고 괜찮은 것도 있고…걸리는 것들이 많아요. 생각해야할 부분들이 많아요”라며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그럴 것이 페네르바체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팬들과 이별을 생각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을 것. 김연경은 불쑥 한 할아버지 팬 이야기를 꺼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꼭 오시는 할아버지들이 있는데 항상 지지해주시고 응원해주세요. 외국에서 왔다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따뜻하게 대해주세요. 제가 페네르바체에서 안 뛰더라도 그분들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따뜻한 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Story 4 ‘국가대표’라는 무게감

감히 이룰 것은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숙제 하나가 남아 있다. 바로 올림픽에서의 메달. 지난 2012 런던올림픽, 한국여자대표팀은 이탈리아와 8강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무려 36년 만에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러나 결승을 눈앞에 두고 미국에게 덜미를 잡혔다.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일본에게 무릎을 꿇으며 4위에 만족해야 했다. 김연경은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언제 우리가 준결승에 한 번 더 나갈 수 있을까, 올림픽에서 그런 기회가 한 번 더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라며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쉬움을 나타냈다.

 

결과는 비록 아쉽지만 그럼에도 김연경은 빛났다. 수많은 선수들을 제치고 여자배구 최우수선수에 뽑힌 것. 스포트라이트는 그녀 것이었다. 세계가 김연경 진가를 인정했다. 김연경도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선수들한테 얘기해요. 제 입으로(웃음).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면 항상 저를 소개할 때마다 프로필이 언급 되더라고요. 저로서는 뿌듯하죠.”

 

런던올림픽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지난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여자대표팀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얘기를 꺼내자 표정도 밝아졌다.

 

“사실 중국 전력이 조금 약했는데 저희가 아시안게임 전에 열렸던 아시아선수권에서 중국팀 같은 멤버한테 3-0으로 졌었어요. 그래서 ‘약하게 나왔는데도 장난 아니다’라고 얘기하기도 했었죠. 그래서 걱정도 됐었어요. 그런데 저희 홈이기도 했고 많은 팬들이 응원해주시고 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좋아요. 은퇴하기 전에 하나는 한 것 같아서요(웃음).”

 

그녀 눈은 이제 2016 리우 올림픽을 향해있다. 그전에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아직 리우행 티켓을 확정하지 못했다. 지난 8월 일본에서 열렸던 2015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컵 여자배구대회에서 올림픽 직행을 노려봤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결국 오는 5월 올림픽 최종예선에 모든 것이 달렸다. 김연경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녀는 “진짜 가고 싶어요. 말로 다 표현이 안될 만큼 올림픽에 가고 싶어요”라며 “그런데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전에는 언니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린 선수들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 선수들한테는 그런 자리가 처음이라 쉽지는 않을 거예요. 역경을 이기고 티켓을 따낸다면 더 뜻 깊지 않을까요”라며 각오를 다졌다.

 

김연경 말처럼 대표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번 월드컵만 봐도 오랫동안 태극마크를 달았던 선수를 대신해 신예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어느덧 김연경도 고참이 됐다. 여기에 주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았다. 그녀는 “대표팀에 들어가면 할 게 많아져요. 제 거 하기도 바쁘고 벅찬데 후배들을 챙겨야 하니까 힘든 부분이 있죠. 하지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며 책임감을 보였다.

 

이번뿐 만이 아니다. 에이스라는 무게는 언제나 있었다. 때로는 그 무게가 버거울 때도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담담히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으니까 당연히 제가 짊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대표팀에 있으면 인터뷰를 거의 제가 해요. 동료들한테 미안해요. 다른 선수들도 주목을 받아야 할 텐데 싶기도 하고. 부담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이어 “잘할 때는 좋은 말들을 듣지만 못할 때는 그만큼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도 있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이 장·단점이 있는데, 저는 그것조차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재밌게 생각하고 있어요. 얼마나 이런 걸 받아보겠어요. 할 수 있을 때 즐겨야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답 속에서 그녀가 왜 대단한 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실력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자세 역시 프로였고 최고였다.

 

아직 최종예선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번을 지난 올림픽에서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기회로 봤다.

 

그리고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협회쪽에서 많은 지원과 관심을 가져주시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선수들이 개개인을 보면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그런데 각자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 대표팀 감독님도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마디 더 한다면 선수들이 세계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킨다면 한국배구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해외리그에서 쟁쟁한 선수들과 뛰고 있는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김연경에게 국가대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클럽보다는 더 큰 느낌이 있어요. 클럽에서 뛰고 있지만 클럽 우승보다는 저에게는 국가대표 금메달, 올림픽 진출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해요. 물론 클럽 우승을 하면 좋겠죠. 그런데 그보다 올림픽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만큼 국가대표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이 강해요.”

 

 

Epilogue 나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인상 깊은 답변 하나를 봤다. 한 인터뷰에서 김연경은 “내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은 것을 이룬 그녀이기에 이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이제 오지 않을까 싶어요. 곧 제가 29살, 만으로 28살이 돼요. 선수들이나 지도자분들이 얘기하는 게 28살 때 배구가 제일 잘 된대요. 보는 눈이 뜨인다고(웃음). 만으로 28살이 되기 때문에 올해가 진짜 최고 전성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만 잘하면 메달도 딸 수 있는 건가요?(웃음)”

 

# 사진 : 유용우 기자, 대한배구협회 제공

 

 

[BOX] 김밥 해프닝

김연경에게 터키 생활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 단박에 ‘돼지고기’ 이야기가 나왔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터키에 거주하는 한국팬이 김연경에게 김밥을 싸줬는데, 내용물 안에 소시지가 있었다. 동료선수들과 함께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다 먹은 뒤에야 일어났다. 내용물 안에 소시지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동료들은 ‘Oh, my god’을 반복했다. 김연경 역시 당황하며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왜 그랬을까? 터키는 무슬림(이슬람교 신도) 국가로 돼지고기를 철저한 금기식품으로 정하고 있다. 보통 소시지는 돼지고기로 만들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이 기겁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급기야 김연경은 김밥을 준 팬을 수소문했고, 연락을 취했다. 그 팬은 “닭고기로 만든 소시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고, 동료들은 처음에 믿지 않다가 계속된 설명에 믿기 시작했다.

 

김연경은 “돼지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같은 팀 소속인 세르비아 출신 브란키차(전 현대건설 소속)와 함께 가끔씩 나가 먹는다”며 “대신 한국에서는 쇠고기 값이 인상됐다고 걱정하는데 터키에서는 매일 쇠고기를 먹는다”라며 웃었다.

 

 

[BOX] “김연경은 이런 선수다” 스승, 동료가 말하는 김연경

 

황명석 전 한일전산여고 교장

‘배구여제’ 김연경에게도 남 모를 아픔이 있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중학교 시절 160㎝ 중반에 불과한 키 탓에 배구를 계속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갓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원한일전산여고(현 수원전산여고) 황명석 감독(전 한국배구연맹 심판위원장)은 “너무 작아서 고민이었다. 잘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며 “더 커지지 않으면 리베로로 전향시킬 것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기적처럼 키가 커지기 시작했다. 황 감독은 “2학년 때부터 주전 레프트로 기용했다. 수비가 워낙 탄탄했고, 공격도 많이 좋아졌다. 졸업할 때까지 계속 좋아진 것 같다”며 기량상승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년 사이, 무려 20㎝ 넘게 커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189㎝에 달했다. 황 감독은 “워낙 기본기가 좋고 노력도 뒷받침 됐다”고 회고했다. 김연경도 기억에 남는 은사로 항상 황 감독을 꼽을 만큼 고마워하고 있다.

 

 

한송이(GS칼텍스)

선수로서 너무 본받고 싶다. 알고 지낸 지도 10년이 다되어 가는데 한결같다. 실력도 뛰어나지만, 변함없는 모습 때문에 주변사람들한테도 많이 사랑받는 것 같다. 리더십도 뛰어나서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모두 (김)연경이를 믿고 따른다.

 

 

황연주(현대건설)

같은 선수로서 자랑스럽고, 동생인데도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기 쉽지 않음에도 항상 잘하고 있는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 선수고, 동생임에도 본받을 점이 많다. 상대편으로 만난다면? 어떻게 막을지 고민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배유나(GS칼텍스)

워낙 잘했던 선배였다. 말 그대로 신이었다. 성격도 밝아서 많이 어울려 다녔고, 경기할 때도 후배들을 이끌어줘서 잘했던 기억밖에 없다. 국가대표에서 같이 뛸 때는 언니가 더 많이 성장했다는 인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