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새로운 여성의 탄생 | 2016/09/01
그가 높이 떠올라 상대 팀 코트의 빈틈을 노릴 때는 드높은 창공에서 땅바닥의 먹잇감을 발견하곤 수직낙하 하려는 송골매의 박진감이 느껴진다. 그가 공격을 성공한 뒤 기쁨에 겨워 긴 두 팔을 벌려 '비행기 놀이 세리머니'를 벌이면 인류 역사상 최대·최강의 폭격기라는 B-52 스트래토포트리스와 같은 위용이 주변을 압도한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김연경(28)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김연경을 흠모하는 팬들 가운데는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걸 크러시(girl crush)'라는 낯선 외국어가 김연경을 거론하는 SNS나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걸 크러시'란 '여자가 다른 여자를 흠모하거나 존경하는 감정'을 뜻한다. 물론 동성애의 감정과는 무관하다. 김연경의 SNS에는 여러 개의 하트(♡)와 함께 "언니 최고"라거나 "언니 사랑해요"라고 쓴 소녀팬들의 댓글이 줄을 잇는다.
원래부터 배구팬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스포츠 애호가들은 김연경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배구계에서 김연경의 위상을 쉽게 말하자면 축구에서 호날두와 메시를 합친 것 정도 된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최근 '김연경 신드롬'의 배경에는 수많은 배알못(배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알못(바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홀로 기계에 맞서는 '인간 대표' 이세돌의 승부사적 매력에 빠져든 것처럼 배알못들은 배구의 기량보다는 김연경의 압도적 카리스마와 전사(戰士) 기질에 매료된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김연경이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장면은 지난 8월 6일 한일전에서 나왔다. 공격에 실패한 뒤 주먹을 불끈 쥐며 화난 표정으로 혼잣말하는 김연경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입술 모양으로 보면 그가 뱉은 말은 'ㅅ 계열(ㅅ 또는 ㅆ)'과 'ㅂ 계열(ㅂ, ㅃ 또는 ㅍ)'의 자음이 포함된 두 음절 단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육두문자가 분명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 댓글과 SNS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전사가 있었다니…" 김연경이 홀로 30점을 올리며 한국이 일본을 3-1로 꺾고 역전승했다는 경기 내용은 뒷전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김연경 식빵 사건'이다. 김연경은 올림픽이 끝난 후 한 인터뷰에서 "너무 의욕이 넘쳐"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이라면서 이 일로 "엄마에게 혼났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여자배구팀은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 패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으나 김연경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키 192㎝, 몸무게 73㎏. 남자에 못지않은 압도적인 점프력과 파워. 거기에 경기 중 쉴 새 없이 고함을 질러대며 동료들을 격려하고 분위기를 띄우는 지도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패해 눈물을 흘리는 동료 김해란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사진이 말해 주는 동료애. 역사적 인물까지 통틀어서도 한국에서 이처럼 크고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 영웅은 없었던 것 같다. 스포츠계만 보면 골프의 박세리,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같은 세계적인 여자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전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현역 시절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자'라는 칭송을 들었던 역도의 장미란도 인터뷰 등에서 보인 말투나 몸짓은 아주 '여성적'이었다.
전투적 페미니즘의 기치를 들고 남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언사를 거침없이 뱉어 내는 인터넷 사이트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세상이다. '현모양처 양성소'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어느 여대에서는 학내 의견 수렴 없이 평생교육 단과대 설립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농성이 한 달 이상 이어지고 있다. '고분고분하고 다소곳한' 전통적인 여성상이 구시대의 유물로 폐기처분되는 때에 김연경이라는 '여전사'가 걸 크러시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추왕훈 cwhyna@yna.co.kr